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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시작에 대해서

by 자유로운 영혼들 2022. 7. 12.

책을 통해서 체스 게임을 배우려는 사람은 게임의 시작과 마무리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만으로도 지칠 대로 지칠 것이고, 시작 뒤에 발전되는 무한히 다양한 움직임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설명서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틈은 여러 거장이 싸웠던 게임에 대한 부지런한 연구로 채울 수 있다. 정신분석 치료의 실제를 위해 세워진 규칙도 비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치료의 시작에 대한 규칙을 정신분석을 실제로 하는 분석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모으려고 한다. 그 규칙 중에 실제로도 그렇지만 정말로 사소한 세부 사항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의 정당성은 그것들이 이 게임의 방식과의 관련성에서 중요성을 획득한 그야말로 이 게임의 규칙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규칙을 '권고'라고 부르길 원하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정도로는 분별력이 있다. 심리적 구성의 놀라운 다양성을 고려해볼 때, 모든 정신적 과정의 적응성과 결정 요인의 풍부함은 하나의 행동 방침이 대체로 타당했을지라도 때로는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반면 보통의 경우에 실수라고 여겨지는 것도 어떤 때에는 원하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황이 대체로 효과적인 절차를 치료사를 위해서 기술하려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몇 년 전에 나는 환자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한 적이 있어서 이곳에서 그것을 반복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그동안에 다른 정신 분석가들에 의해서 입증이 되어 왔다. 그렇지만 내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이후로 내가 환자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할 때 처음에는 그를 일주일 혹은 두 주일 동안 조건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습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환자가 이 기간에 떠난다면 그는 시도했던 치료가 실패했다는 인상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치료사는 그 사례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정신분석에 적합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의사 타진'을 한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이런 절차 외에 다른 예비적인 검사는 아직 없다. 보통의 진찰에서의 장황한 논의나 질의도 대체 방법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예비적인 시도 그 자체가 정신분석의 시작이고 반드시 정신분석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 시간 동안에 환자가 거의 모든 말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계속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외에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식의 한 주 혹은 두 주에 걸친 시험 기간은 진단상의 이유도 있다. 매우 종종, 히스테리 증상이나 강박적 증상을 가진 신경증 환자를 봤을 때 그 증상이 지나치게 뚜렷하지 않고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을 경우에, 그것이 조발성 치매증으로 알려진 것의 예비 단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머지않아 그러한 정서의 그림이 눈에 띄게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구별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진단과정에서 망설이지 않으려는 정신과 의사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만큼 실수하게 된다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실수하는 것은 정신분석가에는 임상 정신과 의사에게보다 훨씬 더 중대한 순간이다. 정신과 의사는 유용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이론적 실수를 하게 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그의 진단은 학문적 관심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신분석가에 만약 그 사례가 순조롭지 않게 되어간다면 그는 실질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는 낭비된 비용과 노력에 책임이 있고, 그의 치료 방법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게 된다. 만약 환자가 히스테리나 강박 신경증이 아니라 망상분열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정신분석가는 치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 그래서 정신분석가는 진단상의 실수를 피하려는 특별히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몇 주의 실험적 치료에서 더 이상의 시도를 하지 않게끔 하는 의심스러운 징후를 종종 관찰하게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종류의 시도가 항상 확실한 결정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현명한 예방책들뿐이다.

 분석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할 수 있는 너무 긴 예비적인 토론, 다른 치료법으로 받은 이전의 치료, 그리고 치료사와 분석을 받게 될 환자 사이에 있는 이전의 친분은 특별히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환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전이 태도를 가지고 치료사를 만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치료사가 시작하고부터 전이의 성장과 발전을 관찰하는 기회를 갖는 대신에 그러한 전이 태도를 우선 천천히 발견해야만 한다. 이러한 식으로 환자는 우리와 함께 그런 임시적인 시작을 하게 되는데, 치료가 이렇게 시작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치료가 시작되기 전에 예약을 연기하고 싶어 하는 모든 예비 환자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경험상 보면, 그 연기의 동기, 즉 그들의 의도의 합리화가 초심자에게는 의혹의 여지가 없게 보였을지라도 약속된 시간이 되었을 때 그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분석가가 새로운 환자나 그들의 가족과 친분에 있든지 또는 사회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있을 때 특별한 어려움들이 발생한다. 친구의 아내 또는 아이를 치료해달라고 부탁받은 경우 정신분석가는 치료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그 친분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데도 믿을 만한 다른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일반 대중과 의사들은 아직도 정신분석을 암시에 의한 치료와 쉽게 혼동하면서, 환자가 이 새로운 치료법에 거는 기대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종종 어떤 환자는 많은 어려움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데, 이는 그 환자가 정신분석에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고 분석의 진실성과 효력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들은 다른 경우의 어떤 환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치료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 환자가 회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분석의 성공적인 결과를 자신이 스스로 경험하기까지는 어떤 것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은 환자의 이러한 태도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처음의 신뢰나 불신은 신경증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내적 저항과 비교해보면 거의 무시해도 될 정도이다. 환자의 우호적인 신뢰는 초기의 관계를 매우 유쾌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그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그의 우호적인 선입관은 분석에서 일어나게 되는 첫 번째 어려움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게 될 거라고 그에게 경고해야 한다. 회의적인 사람에게 우리가 말해주어야 하는 것은, 분석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가 원하는 만큼 비판적일 수도 있고 의심할 수도 있고, 우리는 그의 태도가 그의 판단의 영향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신뢰할 만한 판단을 내릴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치료의 규칙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성실히 지키려고 한다면, 그의 불신은 다른 증상들처럼 단지 하나의 증상일 뿐이고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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